조금 정신이 들고 나니 오늘은 그만하자는 이세진의 말이 들려온다. 괜찮으니 더 하자고 말하기에는 제 꼴이 처량 맞았다. 배세진은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대답을 바라고 한 말도 아닌 것 같았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던 배세진이 멈칫했다. ……몸에 힘이 안 들어갔다.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까딱이는 이세진이 ...
터덜터덜 방으로 들어온 배세진은 곧장 침대에 쓰러졌다. 오랜만에 종일 바쁘게 움직였더니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이 지난 기분이다. 복습…… 해야 할 텐데. 생각은 들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 복습이 필요할 만큼 뭘 많이 배우지도 않았다. 초등학생 수준의 수업일 거라는 말이 맞았다. 생전 처음 듣는 내용이었지만 따라가기 어렵지 않았다. 아직은 말이다. ...
네, 이세진입니다. 이세진은 닫힌 현관문 위로 기대어 전화를 받았다. 저장되지 않은 낯선 번호의 주인은 센터장의 비서였다. 와, S급 달고 나니 비서한테 직통 전화도 다 받네. 물론 단순히 S급이라서 받은 게 아니라는 건 이세진도 알았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을 다시 한 번 굳이 상기시킨 비서는 할 말이 다 끝났는지 더 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또 피를 뽑는다. 건강 상태 체크하다 빈혈로 쓰러지겠다. 모습을 드러낸 첨예한 바늘에 배세진은 고개를 돌렸다. 이러나저러나 아플 거라면 안 보고 말지. 안 보고 있다가 갑자기 아픈 것보다는 지켜보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낫다는 사람들도 있던데, 배세진은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였다. 그야 바늘이 살갗을 뚫는 걸 눈으로 확인까지 하면 1만큼 아플 게 100만...
모든 것들의 기원을 아는가. 명쾌하게 밝혀진 것들도 많지만 보통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들이 태반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들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됐다. 자연스럽게 인류 공동의 적이 된 괴물들이나, 신인류라 불리는 이들이나, 그런 것들. 그날도 역시 그저 똑같이 여상한 날이었다. 배세진은 눈을 깜빡였다. 평범한 공간, 평범한 공기 속 평범한 문장 ...
재회는 우연이었다. 담배 좀 피우고 오겠다고 하면 들러붙을 인간들이 한둘이 아닐 걸 알기에 몰래 술자리를 빠져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볼을 스치자 좀 살 것 같았다. 배세진은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들었다. 바람이 불어 쉽게 붙지 않는다. 짜증스레 인상을 쓰고 최대한 손으로 가려본다. 한 손으로는 어떻게 해도 바람을 막기가 어려웠다. 이래서 다들 전자담배로 갈...
* 약간의 데이트 폭력(가스라이팅), 가정폭력 묘사가 있습니다. #21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말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기억도 희미한 아주 어린 시절에는 나름 재잘거렸던 것 같다. 말이 없어졌던 건 그 남자가 다른 아빠들과는 다르다는 걸,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였다. 유치원에 들어가 처음으로 만난 내 또래의 다른 아이들이 말하는 ‘아빠’...
#19 군대로 도망친다고 해서 평생 안 보고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당연히 그걸 기대한 것도 아니다. 적어도 덜 보고 살면 잊힐 걸 기대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천천히, 느리게 배세진에 대한 마음을 접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였다. 신체검사 1급의 건장한 대한민국 남성이라는 게 이렇게 다행일 수가 없었다. 얼굴을 안 보면 천천히 잊어 갈 줄 알았다...
#13 이렇게까지 말을 안 하고 지낸 적이 있던가. 애초에 집에 있는 시간이 줄었다. 일부러 집을 피했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독서실은 너무 조용해서 집에서 공부하는 게 더 좋다는 말을 했던 게 무색하도록 독서실에 틀어박혀 살았다. 가족들은 수능이 가까워지니 아무리 나라도 예민해지는구나 생각하는 듯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맞는 말도 아니었다...
#9 종이에 샤프가 긁히는 소리만 들린다. 새삼스럽게 침묵이 신경 쓰인다. 문제를 풀다 흘끗 바라본 배세진은 다음 지문을 미리 읽고 있었다.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못 가르치는 배세진은 그래도 언제나 내 과외에 열심이었다. 지금 보고 있는 지문도 이미 책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분석해놓고는 또 보고 있다. 아빠가 동생 가르치느라 고생한다며 주겠다는 과...
* 배세진의 전애인이 모브로 등장합니다. * 약간의 가정폭력 묘사가 있습니다. #5 방이 건조했나. 자다 깨니 미칠 듯이 목이 말랐다. 작게 헛기침을 해보니 찢어질 듯 아프기까지 하다. 일어나기 귀찮은데……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부엌으로 나갔다. 정수기에서 물을 받고 졸린 눈을 끔뻑이며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잖아. 다시…… ……마! ……나중……” 소...
#3 독서실에 갈까 하다 말았다. 부모님 두 분 다 주말 출근을 하셨으니, 내가 독서실에 가면 배세진 혼자 이 집에 남겨지게 되는데. 어제 그 꼴로 보아선 오늘 꽤나 고생할 거 같거든. 엄마는 어릴 때 돌아가셨고, 아빠는 늘 바빴고. 덕분에 간단한 요리―레시피가 확실한―는 그럭저럭 했다. 열릴 생각도 없어 보이는 배세진의 방문을 슬쩍 쳐다봤다가 스마트폰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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